분기에 한 번씩은 누아르 장르에 꽂히곤 하는데, 가장 최근, 그러니까 3-4주 전쯤 뒤늦게 ‘마이네임’에 꽂혔더랬다. 유튜브 리뷰 영상 하나로 시작해, 리뷰란 리뷰는 다 찾아보고, 플레이리스트까지 섭렵한 후, 결국 구독하지도 않는 넷플릭스에서 정주행까지 마쳤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크러쉬를 안겨준 최무진 캐릭터, 그리고 그 본체 (캐릭터 연기한 배우를 본체라고 부르는 거 보고 빵 터짐 ㅋㅋㅋ) 박희순 배우에게서 나 또한 한 동안 빠져나오지 못했다.
최무진에서 박희순으로 애정이 넘어간 데에는 정주행의 몫이 컸다. 유튜브 리뷰나 플리를 보고서는 ‘아무리 빌런이지만 너무 멋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당연하지. 가장 자극적이고 매력적인 장면들만 모아놓은 거니까. 그런데 정주행을 하고나니, 뭐랄까. 아주 사소한 장면 장면을 통해 최무진의 악랄함을 느끼게 되었다. 멋있는 놈이 아니라 나쁜 놈이었구나, 깨닫게 된 거다. 나쁜 남자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닌 나로서는 결과적으로 무진에게 정 떨어지고 희순에게만 정이 남아버렸다.
박희순 배우님의 필모를 쭉 훑고 인터뷰 영상까지 섭렵하면서 (영상마다 최무진 따라 여기까지 왔다는 댓글 때문에 또 빵터짐ㅋㅋㅋㅋㅋ) 성실한 노동자, 오래된 직업인을 떠올렸다. 2년 만에 찾아갔는데 면 익히는 정도와 국물 진하기 취향까지 기억해주신 가마마루이 주방장님이 떠오르기도 했다. 40년 가까이 같은 학교에서 평교사로 몸 담아오다 은퇴하신 우리 엄마가 생각나기도 했다. 그런 분 같았다. 악역이나 형사, 혹은 경찰 류 캐릭터의 프로토타입화 되어왔으면서도 여러 캐릭터를 소화하며 배우로서 배우다운 삶, 그러니까 ‘연기하는 삶’을 살아오신 듯했다. ‘오랜 기간 안 뜨다 크게 하나 빵 터뜨렸다’는 평가도 여럿 보았는데, 뜨려고 연기해오신 분은 아닌 것 같이 느껴졌다.
배우로서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주연’을 제의받을 때와 ‘조연’을 제의 받을 때의 기분이 다를까? 늘 ‘조연’을 맡다 어느 날 ‘주연’을 맡을 기회가 된다면, 크게 기쁠까? 반대로 늘 ‘주연’만 맡다가 ‘조연’을 맡게 되면 그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인 걸까? 박희순 배우님은 그분의 연기 인생 가운데 어떤 마음으로 조연을 받아들이셨고, 주연으로 큰 인기를 누리게 된 지금은 또 어떤 마음이실까.
작년 말, 특별한 목적이나 상황 없이 40일 작정기도로 이끄심을 받고 기도를 하며 중보기도를 참 많이 하게 되었다. 그중에 가장 크게 마음을 주신 한 지체가 있었다. 올해 그 자체와 가깝게 지낼 일이 많아져서 그런가 보다 하고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범위 내에서 그 지체를 위한 기도를 쌓아왔다. 알고 보니 그 지체는 신앙적인 관점에서 인생의 아주 중요한 순간을 지나고 있었다. 나 역시 비슷한 종류의 다른 상황으로 겪어본 적이 있는 순간이기도 했고, 인간적인 관점으로도 가벼운 상황이 아니었다. 여하튼 기도가 많이 필요하고 또 위로와 격려와 보살핌이 많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 지체의 성격과 성향상 더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여러모로 마음 쓴 지 별써 몇 주가 되었다. 기도도 하고, 끼니도 많이 챙겨주고, 그 지체의 감정도 자주 살피고. 뭐랄까, 평소에 친구들들과 교제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그 지체를 중심에 두게 된 것 같다. 나와 상대가 동등한 입장에서 교제한다기보다는 내가 상대를 위해서 무언가를 행하는 느낌. 그 느낌이 지속되면서 마음이 약간 오묘해짐을 느꼈다. 그 상황을 알고 있는 다른 영적인 리더들도 그를 보살피는 걸 보며, 그 마음은 더욱 선명해졌다. 처음 하나님께로부터 마음을 받을 때만 해도 그 지체는 내 여러 기도제목 중 우선순위가 높은 하나의 기도 대상이었다. 지금은 뭐랄까, 나 자신이 하나님께서 그 지체의 아픔과 회복을 위해 붙여주신 여러 사람 중 하나로 느껴진달까.
말장난처럼 보일지 몰라도, 이 둘은 엄청난 관점의 차이를 지닌다. ‘내 기도리스트에 적힌 그’와 ‘그를 위해 세워진 나’는 내가 주연이냐 조연이냐를 결정짓는 정도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대본을 받아든지 한참 되었고, 크랭크인도 이미 오래전. 내가 주연인 줄 알고 열심히 그 역할을 소화하고 있었는데, 주연이 아니라 조연이었구나를 뒤늦게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상당한 충격이었다. 아, 역할을 잘못 알고 있었구나, 작가의 큰 그림은 이거였구나, 뒤늦게 캐치한 것이 얼얼하달까.
그러고 나니 은밀하게 나 혼자 간직하고 있던 죄성도 이해가 되었다. 내가 그 지체를 위해 하는 기도와 마음씀과 시간씀과 그 여러 가지 것들을, 기회가 된다면 누군가에게 드러내어 칭찬받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근본적으로는 내가 중심이자 주인공으로서 누구를 돕고 선을 베풀고 싶었던 거다. 주연이 되고 싶었던 거고, 주연일 거라 생각했던 거다. 믿음과 기도에 응답받고, 내 삶의 문제들이 해결되고,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내 신앙의 메인스토리일 때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지체의 상황과 마음을 심각하게 여기시고,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돕는 역할을 맡게 하시고, 그 지체를 돌보시는 상황을 쭈욱 따라가면서 ‘내가 주연이 아닌 순간’에 대해 비로소 자각하게 되었다. 다른 지체의 신앙 여정과 고비 가운데 함께하는 조연으로 스스로를 인지하고 나니, 그것 참 생소하였다. 그동안은 내 인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주연으로만 삶을 사는 게 당연하다 여겨왔던 거다.
그러나 내 인생은 내 인생이 아니다. 하나님 주신 시간과 공간의 합이요, 하나님이 목적을 두고 빚으신 하나님 것이다. 얼마나 될지 모르는 삶 속에서 이 역할을 맡기시든 저 역할을 맡기시든 감사히 순종하면 되는 것이다. 사실, 주시는 상황과 환경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는 결단은 오래 전에 마음에 심어두었다. 토기장이가 토기를 귀하게 쓰려 빚든 천하게 쓰려 빚든, 토기장이의 결정일뿐이라고, 엿장수가 엿을 어떻게 자르든 엿장수 마음이라고 아빠가 늘상 말씀하셨듯이. 세상의 높은 자리에 처하든 낮은 자리에 처하든, 대단한 역할을 맡든 소소한 역할을 맡든, 그건 하나님 주권 아래 있다고. 나는 그저 지음 받은 목적 대로만 살면 된다고 다짐해온 게 지난 20대의 훈련 중 하나였다.
토기장이에게, 흙 한 덩이를 둘로 나누어서, 하나는 귀한 데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한 데 쓸 그릇을 만들 권리가 없겠습니까? 로마서 9:21
그럼에도 내가 내 인생에서의 ‘주연’일거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니까 금수저 역할이든 흙수저 역할이든, 한국을 배경으로 하든 미국을 배경으로 하든, 내 인생을 통해 펼쳐지는 하나님 이야기에서의 ‘주연’은 당연히 나일 거라고 여겼다. 어쩌면 프레임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의 큰 그림, 큰 섭리, 큰 역사는 내 삶을 넘어온 세계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그리고 수많은 세대와 시간 가운데 흘러왔다 흘러가는 것인데, 협소하게 나 하나의 인생 안에 그 큰 스토리를 가둬놓은 거다. 이 자기중심적인 마음이 혹시나 그 사이 하나님 나라 조연의 기회들을 고사하게끔 만들었던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수많은 조연의 경력으로 연기를 갈고닦아온 배우들 앞에, 수많은 조연의 역할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온 믿음의 선배들 앞에, 참으로 부끄럽고 철없는, 그리고 교만한 모습이다.
조연의 삶이, 수많은 조연을 맡으며 다작하는 삶이, 하나님 안에서 얼마나 복된 삶인가 생각한다. 내일, 한국 시간으로는 오늘, 인생 첫 단독 V라이브를 진행하신다는 박희순 배우님을 생각하며 더욱 그렇다. 작금의 인기를 내심 반가워하시면서도 어색해하시는 배우님 귀여워... 가 아니라, 남우조연상 받으면서 남기신 수상소감이 마음이 오래 남는다. “아직 많이 부족한데 그렇기 때문에 저는 내일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볼품없는 ‘주연’일지라도, 그보다 더 분량 적은 ‘조연’일지라도, 설령 까메오일지라도. 부족한 나를 하나님 나라의 대서사 그 위대한 작품에 출연시켜주신 것에 감사하며, 무슨 역할이든 묵묵히 성실히 최선을 다해, 맡아보련다. 그래서 무슨 역할로든 관객에게 감동과 기쁨을 주는, 무엇보다 작가의 의도를 충실히 담아내는 성숙한 배우로서 인생이라는 작품을 살아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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