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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유신론자의 자아성찰

좁은 길, 그 외로운 길

by 가나씨 2021. 11. 10.

몇 주째 외로운 마음을 안고 있었다. 계절마다 찾아오는 유행성 독감처럼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영적 외로움이다. 오래전 함께 동역했던 이들이 하나님 곁을 떠나 방황하고 거룩한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더 깊어지는 그런 외로움이다. 주변에 허락하신 믿음의 지체들 많지만, 그네들도 이런 영적 외로움으로 분투하는 날들이 많겠지만, 나와 꼭 같은 처지와 상황과 경험을 토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온전히 나눌 수 없는 그런 외로움이다. 어젯밤 동네를 몇 바퀴 돌며 누구에게 연락해 이 마음을 토로해볼까 고민해봤으나 떠오르는 얼굴이 딱 하나뿐이라 더 깊어진 그런 외로움이었다.

그렇게 마음으로 떠올리기만 하고 연락은 남기지 않았는데, 조금 전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2주 반 만이었다. 그녀도 얼마나 외로웠으면 평일 출근 전 꼭두새벽에 전화를 다 걸었을까. 우리는 터져나오는 울음을 훔치며 같이 한숨 쉬었다. 그럼에도 서로 같은 한 명이 있음에 감사했다.

이 길은 좁은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라 하시길래, '좁으면 좀 어때요, 저는 그 길 갈 수 있어요.' 자신했던 어린 날들이 다 지나갔다. 그말인 즉슨 함께 가는 이가 적은 길, 그래서 외롭고 소외감 느껴지는 길이라는 걸 이렇게 한 해 한 해 더 깊이 깨닫게 된다. 이 외로움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직시했던 6년 전 그날도 그렇게 외로운 날이었다. 백양로를 한참 걸어올라가 도착한 연구실에 아무도 없다는 걸 발견하자 몇 주를 앓고 있던 영적 슬픔이 눈물로 터져 나왔다. 그곳에서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기도했다. 외롭다는 응석, 힘들다는 투정이었지만, 그래도 하나님 기꺼이 받으시는 기도였는가 보다. 울면서라도 이 좁은 길을 가야겠다는 마음이, 6년도 더 지난 오늘 다시금 되새겨지는 걸 보니 말이다.


2015년 2월 9일

난데없이 눈이다. 난데없이 불어온 마음을 따라 들은 찬양 앨범은 '김도현-그 나라의 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탄식으로 시작한 시가 또 난데없이 마음을 파고들자 이제야 이 모든 괴로움의 근원을 알겠다.

빼앗긴 들에서도 당연할 수밖에 없던 '먹고 살 궁리'는 사회를 일그러뜨렸다. 친일로, 배신으로 점철된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힘이 있다. 실재한다. 개인적인 루트를 통해 들은 어느 사립고 이사장 이야기나 뉴스를 통해 듣는 기득권층의 발언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양상은 다르지만 본질은 똑같다. 그 논리가 먹고 살 궁리에서부터 출발했음이 가장 무섭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 궁리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

빼앗긴 들을 애통해 하며 되찾으려 했던 사람들의 삶은 엉망이었다. 그들이 '확신에 찬 activist'였을 거라는 생각은, 편견일지도 모르겠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정말 봄이 올까, 정말 봄이 다시 오기나 할까, 이런 고뇌를 가슴에 안고, what if 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서성이며, 뒤돌아보며, 주춤대며, 그럼에도 결국은 몸을 찢고 삶을 찢으며 살았을 테다.

풍요가 넘치는 세대, 극단적 풍파 없는 나라에 살면서도 여전히 빼앗긴 들 어드매에 서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죽고 죽이는 복수가 중동에서 끊이지 않는다. 국제동맹군의 공격으로 7000명이 죽었단다. 7000개의 삶이 송두리째 날아갔다. 7000은 어떤 숫자일까?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을 살려 두면 그들 손에 다른 7000명이 죽었을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옳고 그름의 문제를 상대성의 논리에 편입시키면 답이 없다. 그렇다고 가만히 놔둘 수도 없다. 결국 인간의 방법으로,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은 왜 가만히 계시나? 전쟁의 때마다, 분쟁의 장소마다 짠 하고 나타나셔서 해결하지 않으시고, 왜 이 세상을 이렇게 모순투성이, 문제투성이로 내버려 두시나? 리셋버튼을 누르시지 않는 까닭은, 동일선배 말 맞다나 사랑 때문이다. 그래서 그 분은 당신의 사람들에게 당신의 뜻과 길을 가르치고 이렇게 살아보라 제안하신다. 그 뜻을 먹은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와 삶을 드려 부르신 뜻대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데 동참한다.

성경 속 이야기가 아니다. 오랜 세월, 성공에의 유혹이 물밀 듯 쏟아지는 캠퍼스에서 영원의 관점을 길러 내시는 김영민 간사님의 삶을 나는 목도하고 있다. 제도권 교회의 문제와 타락 앞에서 말씀을 대안으로 삼고 사역하시는 주영범 목사님의 삶도 본다. 목회나 사역 뿐만 아니라 세상의 일로도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영향력 있는 큰 사람이 되어야만 하나님 일을 하는 것이 아님도 잘 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게 요즘의 화두다. 답은 부르시는 대로 사는 것임을 알면서도 생각만 많다.

프로포절을 쓰러 책상에 앉아, 이 공부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데 일말의 도움이나 될까 생각한다. 그보다는 이 논문이 학술시장에서 잘 팔릴 수 있을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애정 어린 조언은 수없이 들었다. 주신 비젼이고 하나님이 당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실 것을 알면서도, 믿는다 고백하면서도, 나의 무능과, 이 일의 유용성과, 먹고 살 길을 어줍잖게 내 식으로 계산하다 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진취적이지도 못하고 겁도 많아 징징징 괴로운 마음만 하나님 앞에 쏟아 놓은 채, 그렇다고 하나님 나라를 외면하고 내 살 길을 위한 cost-benefit calculation에 능하지도 못한 채, 이 빼앗긴 들 한복판에서 서성이고 있다.

그럼에도 빚어 가실 분은 하나님임을 고백한다. 나에게는 소망이 없지만, 그분께 소망이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빼앗긴 들에서 봄을 바라며 살아가는 그 나라 백성임을 잊지 않는 것이다. 결단과 행동이 필요한 때에는, 순황이가 늘 기도로 구하는 바와 같이, 지혜와 용기가 허락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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