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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Years in Baton Rouge

반딧불이

by 가나씨 2021. 3. 7.
2020년 10월 5일

 

오늘은 여느날 보다 조금 분주한 날이었다. 오전 시간은 조교일과 미팅 준비로 흘려 보내고, 오후는 미팅, 수업 준비, 수업으로 진을 뺐다. 그렇게 하루의 분기점인 3시에 이르러 잠시잠깐 여유가 생겼을 때 빨래를 돌려놓고 간식을 먹으며 고민했다. 그냥 집에서 쉴까 학교에 갈까.

마음이 생각보다 쉽게 기울었다. 좋은 날씨 다 가기 전에 하루라도 더 자전거 타자 싶어서 저녁 도시락까지 싸들고 학교로 향했다. 때마침 픽업해야 할 책도 도착했다기에 그것부터 처리하고, 오랜만에 오피스에 앉아 오전에 못다한 조교일을 꺼내들었다. 그러다 살짝 열린 오피스 문 사이로 "혹시 한국인이세요?" 하는 반가운 소리. 이번학기부터 사회학과에서 박사과정 시작했다는 한국인 한 분을 만나 한참 담소를 나눴다. 오피스 문짝에 적힌 내 이름을 보며 한국인일까 한국을 좋아하는 외국인일까 생각했는데 드디어 만났다는 그분의 말에, 한국인 하나 없던 스텁스홀 3층에서 처음으로 자리잡고 공부한 날이 스쳐지나갔다.

그러던 중 연락 온 혜원이는 낮잠에서 깨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전화했다는데 잠결이라 왜 했는지 모르겠다며 같이 저녁을 먹잔다. 학교에 도시락을 싸왔다 하니 자기도 싸오겠다 하여 유니언퍼레이드에 앉아 한껏 가을저녁을 즐겼다. 웃기도 많이 웃고 사진도 많이 찍고. 인솜니아 쿠키로 마무리한 완벽한 저녁이었다.



그러고 다시 오피스로 향해 1시간 가량 머물며 내일 있을 미팅 준비를 마쳤다. 아무도 없는 3층 복도를 내려와 깜깜한 밤 자전거 불을 켜고 락을 풀다보니 석사시절 생각이 났다. 그 나날들의 절반은 나 혼자 연희관 문닫고 나오고, 나머지 절반은 경원오빠 효열언니 연주언니와 함께 문닫고 나왔던 것 같다. 어둠 속에 현관을 내려오다 발목을 접질렀던 날도, 원장실에 늦게까지 불켜진 걸 보고 솜니가 페이스북에 포스팅을 남겨준 날도 기억난다. 여휴나 원장실에서 밤을 새고 새벽 동 틀 무렵 집으로 향하는 날도 적지 않았다.

어두컴컴 인적 드문 백양로를 걸어내려오다보면 혼자이든 여럿이든 늘 외로웠다. 사람의 부재나 관계의 결핍으로 느끼는 그런 외로움이 아니기에 외로움이라 일컫는 게 적절하지 않은 것도 같지만,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감정이었다. 하고 있는 이 작업들이, 이 아득한 자기와의 싸움이 고독하여, 동료들과 왁자지껄 이대후문에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들어오는 길에도, 학교 근처로 드라이브를 하러나갔다 들어오는 길에도 외로운 나날들이었다. 주일 오전, 교회가기 전까지 1시간 밖에 여유가 없을 때에도 굳이 백양로 끄트머리에 위치한 연희관 꼭대기 501호까지 발걸음을 하고 내려오게 만드는 그런 지독한 외로움이었다.

그렇게 외로운 길인 줄 알면서도 더 외로울 유학길에 겁없이 올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지 4년째. 이 길은 여전히 괴롭고 지독하게 외롭지만 이제 삶의 일부분이 되어버렸다. 이 와중에 이 외로운 나날들을 가만히 빛내주는 작은 일들을 꼽아보게 된다. 지도교수 앞에만 서면 짧아지는 영어인데도 내가 하려던 말, 전달하고 싶은 포인트를 캐치하여 해결해주는 학문적 조언이 그렇다. 같은 처치를 서로 위로하고 공감해주는 다른 주 언니 오빠들의 신세한탄 카톡이 그렇다. 어느덧 경험자의 위치에 놓인 내 작은 도움도 기쁨으로 받아주는 낯선 사람들이 그렇다. 이곳에서 처음 만나 시간과 마음을 나누며 가까워진 혜원이의 "언니 뭐해요" 한 마디가 그렇다. 혜원이가 찍어준 영상을 보며 왜 kf 아니고 덴탈마스크 쓰냐고 혼내는 저 멀리 한국 친구들의 마음씀이 그렇다.

언젠가 밤늦게 백양로를 걸어내려오며 오늘과 같은 마음을 담아 쓴 페북 포스팅에 한 지인이 이런 댓글을 남겼었다. "불 꺼진 백양로를 걸어내려오는 가나는 반딧불이 같을거야" 그때나 지금이나 어디에도 내게서 나는 빛은 없다. 다만 주변에서 밝혀준 빛들이 이 외로운 길을 은은히 빛내주고 있을 뿐이다. 내일도 계속될 이 괴롭고 외로운 여정 가운데 또 어떤 빛들이 허락될지 미리 감사하게 되는, 깜깜한 가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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