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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Years in Baton Rouge

미국 운전면허증 발급

by 가나씨 2021. 3. 7.

미국에 와서 학교 측의 행정적인 문제로 고생한 적은 한두 번이 아니지만 공공기관에서의 에피소드는 딱히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서 뭐 결혼이나 신분 문제로 서류 처리할 일이 없었으니 Social Security Number (SSN) 발급받았던 게 유일한 경험이었다. 기다린 지 10분도 안 돼서 속전속결로 처리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마저 타이밍 좋게 도착했던 기억 덕분에 미국 DMV (Department of Motor Vehicle)가 악명 높다고 해도 설마 그렇게 까지겠거니 했다.

 

미국 생활 4년 차이지만 아직까지 차 없이 생활하고 있는 와중에 가장 불편한 것은 차가 아니라 면허증이 없는 것이다. 신분 확인이 필요한 상황마다 여권을 들고 다니기가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사실 작년까지 한국 운전면허증도 없었는데 유학 오기 전 한국에서도 딱히 운전할 일이 없었고 주민등록증이 있으니 그야말로 '필요'가 없었다. 미국에서는 신분 때문에라도 필요한 것 같아서 운전면허 교육을 수료하고 시험을 봐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작년 초 (2019년 2월)에 한국-루이지애나주 간 양해각서가 체결되어 한국 운전면허가 있으면 루이지애나주 운전면허증을 곧바로 발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작년 여름, 한국에 들어가자마자 운전면허 학원 등록하고 한 번에 합격해 면허를 땄다. 다만 한국 면허 외에도 여러 서류들이 필요한데 그중에 하나가 한국에서 발급받은 '국제면허증' 이거나 미국 내 한국 대사관에서 발급받은 '공증'이었다. 그래서 미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경찰서에 가서 '국제면허증'도 발급해왔다. 중요한 서류는 모두 준비 완료!


미국 루이지애나주 한국 운전면허 교환을 위해 가져 간 서류

  • 여권 / I-20 (F1 비자 관련) / I-49 (입국 관련)
  • 소셜시큐리티넘버 카드 (SSN) / 학생증
  • 현재 거주지를 증명할 수 있는 우편물 2부 이상
  • 한국 운전면허증 / 국제면허증 (공증 대신)

 

문제는 DMV에서 일 처리할 때 꼬박 하루를 버린다 생각하고 가라는 주변 사람들의 조언 때문에 면허증 바꾸러 갈 엄두가 나지 않더라는 것. 1년이 다 되도록 면허 발급을 미루다가 국제면허증 유효기간이 다 돼가길래 마음먹고 DMV에 가는 날을 정했다. 아침 8시에 서비스 오픈이라는데 그렇게 일찍 갈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8시 30분에 집에서 출발, 9시쯤 도착하고서는 곧바로 후회막심했다. 건물을 반 바퀴 빙- 두를 정도로 길게 서 있는 줄. 코로나 상황 때문에 건물 안에 들이는 인원수를 제한하면서 불가피하게 건물 밖에까지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치만 줄 서서 2시간 기다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11시쯤 건물 안에 입장하여 번호표를 뽑았기에 오전 중에는 일을 마무리하겠구나 싶었는데, 이게 웬 걸. 그때부터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3시간 여의 드라마가 시작됐다.

 

 

1. 공무원 갑질? 인종차별?

 

첫 번째 문제는 권태롭게 일 처리하던 백인 아주머니 직원이 국제면허증을 문제 삼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서류 처리를 하다가 내가 driving test를 받으려는 게 아니라 out-of-state license transfer를 하려는 거라고 재차 말했더니 (처음부터 말했던 부분인데 일을 잘못 진행한 것 같아 보였다) 내 한국 면허증이 영어로 돼있어서 읽을 수가 없다는 거였다. 그래서 같이 제출한 국제면허증의 두 번째 페이지에 영어 설명이, 마지막 페이지에 내 신상 정보가 영어로 적혀있다고 (전혀 공격적이지 않고 조심스럽게) 얘기했더니, 여권에는 Republic of Korea인데 국제면허증에는 South Korea라고 돼있다는 걸 핑계로 번역문을 가져오라고 했다. 어디서 번역문을 받아오냐 물었더니, maybe LSU? (세상에) 그래서 한국 외교부에서는 주미대사관 (루이지애나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주휴스턴 대사관)에서 공증을 떼가거나 국제면허증을 가져가는 것 두 가지 방법으로 번역을 대체한다고 거듭 (차분하게) 이야기했는데...

 

결국 자기는 도와줄 수 없다고, 만약 front에 있는 직원이 이걸 인정해주면 해주고 아니면 안 해주겠다고 으름장을 놔버렸다. 하는 수 없이 다시 front로 가서 한 흑인 아주머니 직원을 만나 상황을 설명했더니 그분은 당연하다는 듯이, 이거 분명 인정되는 것이라고, 왜 안 된다고 하는지 모르겠다며 같이 담당 직원에게로 가줬다. 그 흑인 아주머니가 "Honey, what happened?" 하고 묻자 "She got an int'l license but it is not translated enough"라는 황당한 대답이 돌아왔다. 내 상식인지 우리나라 상식인지 모르겠으나, 국가 공무원이 국가에서 인정하는 서류를 자신이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쓰고 보니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 그 흑인 아주머니는 곧장 알겠다며 나를 데리고 나와 자신이 다른 직원에게 일 처리하게 해 주겠다고 하며 새로운 창구로 안내해줬다. 새 직원은 번호표 없이 온 나를 보며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흑인 아주머니가 예의 '그' 직원이 자기는 처리해줄 수 없다고 해서 데려왔다며 내 등을 토닥여줬다.

 

그 토닥임에 눈물이 핑- 돌고 급 서러움이 몰려왔다. 아까 그 직원과 있을 때만 해도, 혹시 내가 정말 필요한 서류를 빠뜨린 건가, 잘못 안 건가 알아보느라 그런 감정을 느낄 새 없었는데 분명 부당한 처우를 당한 게 맞았다. 외국인이라서 그랬던 걸까, 동양인이라서 그랬던 걸까. 아니면 그냥 기분이 안 좋았던 걸까, 원래 성격이 고약한 걸까. 무슨 이유든 잘못된 행정처리였다. 서러워라. 진짜 눈물이 또르륵 흘렀지만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티 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이게 그 공무원의 '인종차별'이었다면 이런 일들로 얼마나 많은 유색인종 사람들이 그동안 크고 작은 서러움들을 당했을까. 인종차별이 아니라 그저 '갑질'이었다면, 그래서 그냥 고생하는 정도가 아니라 발급을 못 받는 상황도 있을 수 있는 거라면, 이게 무슨 효율적인 국가 시스템인가. 그럼에도 그 흑인 아주머니가 있었기에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였고 서러운 마음에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나를 데려다주고 돌아서는 아주머니에게 You are my angel 한 마디 했던 게 오늘 한 말 중 가장 아름답고 또 가장 진심인 말이었다.

 

 

2. 무능력한 공무원? 

 

나를 새로 맡은 직원은 서류에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일 처리를 곧장 진행했다. 이 사람은 젊은 흑인 남자였는데 일을 처리하면서도 핸드폰 메시지를 수시로 확인하고 뒷자리 직원과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낄낄대는 게 영 불안 불안했다. 그간 학교 행정처리에서도 여러 실수를 경험했던 지라, 나는 'ID로 사용할 수 있는 Driver's License (federal approved)'를 발급받고자 하는 거라고 분명히 얘기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일처리가 완료되고 수수료 결제 후 발급 창구로 넘어가 사진을 찍고 카드를 발급받았다.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은 사진. 오 나쁘지 않게 나왔네- 하고 카드 내용을 확인하는데, 어랏? 이거 운전면허증 맞아?

 

그렇게 카드를 확인하며 걷고 있던 나에게 누군가가 "Is everything okay now?"라고 물었다. 아까 그 흑인 아주머니였다. 잘 모르겠다고, 이게 운전면허 맞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그 담당 직원이 면허 발급 안된다고 했냐고 도리어 나에게 묻는 것이었다. 그 직원이 된다고 했는데 왜 이게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아주머니가 또 한 번 나를 그 직원에게로 데려갔다. "너 왜 이거 발급했니?"라고 묻자, 자기가 실수했다며 새로 발급하겠다는 흑인 남자. 아, 그래도 건물 나서기 전에 발견해서 다행이다- 하고 또 한 10분을 기다렸다 사진을 다시 찍었다. 발급된 새 카드는 확실히  driver's license. 어랏, 근데... not for federal identification? 

 

아마도 점심을 먹으러 나간 모양인지 이번엔 그 천사 같은 흑인 아주머니 직원이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사진 찍고 카드 발급해주는 창구에 있던 백인 할머니 직원에게 가서 문의했다. 내가 원한 건 federal approved라서 그렇게 얘기했는데 이 카드가 나왔다, 혹시 도와줄 수 있냐, 했더니 직접 그 발급 직원에게 가서 내가 요청한 사항을 제대로 전달해 주셨다. 여기도 천사 한 분 추가요... 사실 두 번째 발급하는 과정에서 이미 그 흑인 직원이 first name과 last name을 잘못 기입해서 할머니 직원이 시정하러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자잘하고도 치명적인 실수들인지. 어떻게 이렇게 일 처리를 하는 사람이 공무원이 다 됐나 싶을 정도였지만, 그걸 만회해 줄 다른 직원이 있었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 할머니는 귀찮은 내색도 전혀 없이 오히려 사진을 세 번이나 찍으니까 찍을 때마다 더 잘 나온다며 농담도 건네주셨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받아 든 면허증. 돈으로는 $35이지만 시간으로는 6시간짜리였다. 오후 2시 넘어 DMV를 나오며 미국에서는 최대한 행정처리에 휘말리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미국 루이지애나 DMV에서 발행하는 라이센스 종류

  • 운전면허는 인정이 안 되는 신분증 (투표 등에 사용)
  • 다른 주에서는 신분증 인정이 안 되는 운전면허증
  • 미 전역에서 신분증으로 인정되는 운전면허증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같이 동행한 친구는, 자신이 그동안 미국에서 겪었던 비슷한 (혹은 더 심한) 에피소드 몇 개를 들려줬다. 듣고 보니 새삼 유학생활이라는 고단함을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살아내고 있다 싶어 마음이 짠했다. 그리고 두 가지를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 인종에 상관없이 누구든 타인을 서럽게 할 수도 이롭게 할 수도 있다는 것. 백인 아주머니의 고의와  흑인 청년의 실수로 인해 곤경에 빠지기도 했지만, 흑인 아주머니와 백인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과 손길로 무사히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부정할 수 없는 '특정 인종의 특정 인종을 향한 뿌리 깊은 차별의 역사'가 존재하지만, 그래서 분명 정치적인 노력과 관심도 필요하지만. 정형화된 기준으로 타인을 그룹화시키는 것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차별을 낳을 수 있음을 알기에 적어도 나 개인의 삶에 있어서는 타인을 그저 '성품'으로 보는 관점이 제일 적절한 것 같다. 인종과 국적, 종교와 성별, 그 모든 속성에 관계없이 '마음'을 보는 사람이고 싶다.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느껴지는 마음이 따뜻하기를 바라게 된다.

 

두 번째 깨달음은 일상의 작은 일들을 대하는 태도가 곧 타인을 대하는 태도이기도 하다는 것. 날마다 같은 자리에 앉아 똑같은 일을 반복해서 처리하다 보면, 그래, 매너리즘에도 빠지고, 귀차니즘에도 빠지고, 그래서 대충대충 설렁설렁, 그럴 수밖에 없겠지. 나라도 그렇게 되기 쉽겠지. 그렇지만 나에게 지겹도록 반복되는 그 작은 일이 누군가에게는 단 한 번 있는 중요한 일일 수도 있다.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라는, 작은 자 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주님을 대하는 일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이 결국은 사랑을 위한 길이었구나. 앞으로는 그 어떤 작은 일, 사소한 일, 변변찮은 일, 그런데 계속해야 해서 지겨운 일들을 대할 때마다 오늘을 생각해야겠다. 그래서 일상에서의 성실과 충성이 누군가의 하루를 기쁨으로 또 감사로 채우는 데 귀하게 쓰임 받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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