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21일
쿼런틴 5개월가량을 지나는 동안 삶은 많이도 무료해졌고 에너지를 생산적으로 쓰는 방법도 거의 까먹었다. 덕분에 시간을 쪼개서라도 자주 해오던 요리에까지 흥미를 잃었다. 그 와중에 쉽게 쉽게 조리해 먹을 수 있는 밀키트라든가 라면, 또 주변 어른들이 해다 주신 반찬과 음식들을 데워먹는 일이 잦아 굳이 각 잡고 요리할 필요도 없기는 했다.
그러던 차에 흥미가 생긴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바로 슬로우쿡 :) 찾아보면 여러 레시피들이 있겠지만 미국 사람들이 많이들 해먹는 beef chuck pot roast 에 두 주 전쯤 처음으로 도전한 후, 오늘 또다시 시도하는 중이다. 사실 요리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로 별 게 없다. 그저 적당한 소고기 부위를 찾아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적당히 밑간을 한 후 적당히 재우는 동안 당근, 감자, 양파 등을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적당한 오븐용 냄비에 모든 재료를 잘 담아 적당히 섞어 만든 소스를 붓고 275도 낮은 온도에 두세 시간이고 적당히 broil 하면 끝. 오늘 쓴 고기는 지난번과 같은 chuck steak 부위이긴 한데, 그때는 싱싱한 생고기였다면 오늘은 지난번에 소분해서 소금 후추로 재워 냉동해둔 아이를 사용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30분 뒤쯤 먹어볼 건데 육질이 얼마나 다를지 궁금하다. 과연 슬로우쿡 기술이 생고기와 냉동의 차이를 극복해줄는지.
또 하나 지난번의 경험과 차이가 있다면, 소스 레시피다. 지난번에 소스를 만들 때에는 올리브 오일과 발사믹을 주재료로 사용하였다. 룸메이트 말로는 말 그대로 미국 가정식 팟로스트 맛이었단다. 그때는 집에 감자랑 양파밖에 없어 당근을 못 넣었던 게 조금 아쉬웠다. 이번에는 감자, 양파, 당근의 삼박자를 제대로 갖춘 채 간장과 들기름을 주재료로 사용하였다. 아직 제대로 시식해보지는 않았지만 몇 시간 전부터 거실에는 짭조롬한 갈비찜 냄새가 은은하다. 아궁이에 불 때고 앉아 푹- 찌는 정통 소갈비찜은 아니지만 아무렴 어때. 어쩌면 지난번보다 입맛에 더 잘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그러고 보니 두 번 밖에 안 되는 슬로우쿡의 경험이 작지만 큰 위로를 준다. '아무렴 어때'의 위로. 고기와 채소를 천-천히 익히는 이 과정이 중요한 것이니 양념 정도야 좀 다르면 어때. 그러니까 올리브유 대신 들기름, 발사믹 대신 간장이면 좀 어때, 하는 위로. 당근이 함께 들어가 향을 더해주면 좋지만 없으면 좀 어때, 꼭 필요한 것도 아닌데, 이런 위로. 이런 것에도 위로를 다 받는 걸 보며 지금 지나고 있는 쿼런틴의 시간이 나에게 어떤 부담을 주고 있는지가 조금 선명해진다.
쿼런틴을 통해 자각한 것은 공간의 중요성이었다. 이제 나는 어디서든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공간이 나에게 주는 의미가 그렇게 크지 않다고 자신하던 게 불과 몇 달 전이었다. 그러나 지난 5개월 동안 하루 웬종일을, 일주일의 대부분을 방에서만 보내다 보니 공간 분리가 가져다주던 이로움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누워 있어도 쉬는 것 같지 않고 앉아 있어도 할 일을 하는 것 같지가 않은 이 애매하고도 흐릿한 나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이처럼 일상의 시간을 구분 짓던 많은 공간적 경계들이 허물어지고 나니 학업의 생산성과 마음가짐도 차츰차츰 무너져버린다. 유학 생활을 겪어내며 생긴 지론 하나가 '공간 보다 시간이 더 의미있다' 는 거였는데,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이 지론마저 바야흐로 판데믹을 맞이하여 흐물흐물해진 것이다.
충분히 생산적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개운한 재충전의 시간을 누리지도 못하고 있는 나에게 슬로우쿡이 주는 위로가 뜻깊다. 무엇보다 시간이 맛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참 매력적이고. 재료가 한두 개 빠져도 괜찮다는 점. 그리고, 굳이 슬로우쿠커가 없어도 슬로우쿡 할 수 있다는 점이 그렇다. 그래, 아무렴 어때. 부족하고 모자란 상황에서도 자족하며 시간이 무르익기를 기다리다 보면 저 부드럽고 야들야들한 pot roast 처럼 무언가라도 되어 있지 않겠어. 이렇게 변명 아닌 변명으로 오늘의 게으름을 달래보며 저녁을 준비한다. 어디 슬로우쿡 갈비찜 맛 좀 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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