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미국에서의 첫 주말
Move in 다음 날이었던 금요일에는 온갖 피로를 이기지 못한 채 낮 2시까지 잠들어버렸다. 일어나서 한참을 뭐 해야 하나 고민하다 제일 가까운 드럭스토어인 CVS에 가보기로 했다. 차도 없고 자전거도 없으니 걸어가는 수밖에. 나름 이것저것 장 봐올 것들이 있어서 작은 기내용 캐리어 하나를 끌고 다녀오기로 했다. 카트 하나 가져간다 셈 치지 뭐, 이런 아줌마 마인드로.
걸어서 20-25분 걸리는 길은 한국에서도 어렵지 않게 오가던 거리인데 문제는 제대로 된 인도는 물론 횡단보도도 없다는 것이었다. 쨍쨍한 햇빛과 연한 습기는 덤. 인적은 드물었지만 다행히 바로 옆 대로에 지나다니는 차가 많아서 외지지는 않았다. 아마 차 타고 지나가던 사람들 눈에는 캐리어 하나 끌고 씩씩하게 걸어가는 Asian girl이 신기해 보이지 않았을까?
두루마리 휴지, 물, 다용도 클리너 등등 필요한 기본 물품 몇 개 사서 돌아오니 그게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집 와서 욕조 청소할 때의 그 상쾌함이란! 그와 동시에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못 사 온 물품들이 생각나서 '내일 다시 한번 가야겠다.'는 다짐을 저절로 하게 됐다.
그 다음 날은 토요일. 오전에 잡일 조금 하다가 또다시 캐리어 들고 CVS 쪽으로 향했다. CVS에서 Lee Drive 위쪽으로 한 블록만 더 가면 Oriental Market도 있고 그 다른 방향 건너편은 Walmart Neighborhood Market! 어제 생활용품 위주로 샀으니 오늘은 식료품 위주로 사면되겠다 싶어서 안 그래도 기내용이 아니라 27인지 수화물용을 들고 집을 나섰다.
하필이면 구름 한 점 없는 날이어서 땀을 뻘뻘 흘리며 갔지만 한국에서 사온 휴대용 선풍기를 제대로 써먹을 수 있는 기회였다. 정말 이 더운 도시에 차 없이 시작한 나로서는 가장 유용한 아이템 아닐까 싶다. 다행히 마켓 안은 짱짱 시원! 게다가 Oriental Market에 나름 있을 것들은 다 있었다. 간장, 된장, 고춧가루 이런 기본양념부터 잡채, 숙주나물, 국물 우릴 때 쓰는 멸치까지. 그리고 혹시나 해서 작은 사이즈 산 김치는 생각보다 너무너무 맛있었다. 물론 가격은 전부 다 비싼 편이었다. 제일 속 쓰렸던 양은 냄비는 하나에 8달러 선이었다. 다이소에서 3천 원, 5천 원 주고 샀던 게 생각나서 살까 말까 엄청 고민했다. 사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자 했지만, 아무래도 특히나 Oriental Market에서 파는 것들은 없으면 아쉬운 것들이었다. 가격이 비싸지 않았더라면 금상첨화였겠지만, 여기는 미국, 뭘 더 바라랴 이런 심정으로 감사하며 하나하나 물건을 골랐다. Oriental Market에서 장을 본 뒤 Walmart Neighborhood Market에서 또 간단하게 장을 봤다. 당근, 애호박, 파, 고추, 이런 각종 야채들과 베이컨, 그리고 생활잡화 몇 개. 마트를 나서며 집 가는 길에 어떤 메뉴 만들지 생각하느라 기분이 너무 좋았다.
결국 집에 와서 만든 건 제일 간단하게, 그리고 실패 없이 만들 수 있는 요리들. 숙주나물무침과 된장찌개, 그리고 매운 잡채였다. 역시 뜨거운 밥에는 된장찌개지. 된장 맛 역시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맛있어서 다음에는 나물류 된장무침을 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 깨달았다. 밥을 먹을 때 까지는 밥을 먹은 게 아니라는 것을. 밥을 먹어야 밥을 먹은 것이라는 단순하고도 자명한 진리를. 학기 중에도 부지런히 도시락 싸서 다니겠다던 다짐을 어쩔 수 없이 지켜나가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드는, 미국에서의 첫 주말이었다.
'Writer > Years in Baton Roug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0) | 2021.01.10 |
---|---|
새의 죽음과 그네들의 죽음 (0) | 2021.01.10 |
유학생활 기본셋팅 짐 풀기 (0) | 2021.01.10 |
첫 눈에 반한 도시 바통루-즈 (0) | 2021.01.10 |
애틀랜타 경유기 (0) | 2021.01.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