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youtube.com/watch?v=sF-t1UR7Bzs
아직 실행에는 못 옮기고 있지만 '레터링 타투 몸에 새기기' 를 위시리스트에 넣어둔 지 꽤 된다. 몸과 마음에 평생토록 새겨두고 싶은 문구도 정해두었으니 준비는 다 된 셈이다. Simul Justus et Peccator. "의인이자 죄인" 이라는 뜻이므로 몸 어디에 새긴다 한들 평생 후회할 일은 없을 문구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자들에게는 죽는 날까지 변함없는 진리이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의 삶은 이전과 다르게 바뀌기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신을 입고 사는 현생 동안 '죄인' 이라는 근본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제 아무리 예수 믿고 변화된 사람이라도 변화된 모습과 행위 그 자체를 내세우며 스스로를 의롭다 여길 수 없다. 한국어보다 영어가 더 익숙해지고 미국 음식과 생활양식이 몸에 익는다 해도, 시민권을 취득하지 않는 이상 미국인이 아닌 것처럼. 여전히 근본이 죄인인 내가 어찌 경건해진 삶과 구별된 생활을 가리키며 스스로를 의롭다 하리오.
그런 의미에서 '칭의'라는 개념은 곱씹을수록 이상하다. 마치 상한 고기를 랩으로 둘둘 싸서 USDA Angus Beef 스티커를 붙여놓은 것과 마찬가지다. 여전히 죄인이고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을 믿음으로 고백하였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의인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아니, 의인이 '된' 것이 아니라 의인 '취급'을 받는 것이지. 내 안의 죄인으로서의 속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니까. 다만 죄인 된 속성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따라 의인의 길을 걸어가는 것일 뿐이다.
그것이 온전히 깨달아지던 순간, 성령님께 참으로 면목이 없었다. 먼지 한 톨 없이 깨끗이 청소한 다음 가장 귀한 것들을 가득 내어 대접해야 하는 VIP 손님보다도 더 귀하신 분인데. 여전히 더럽고 냄새나는 내 안에 꾸역꾸역 찾아오시는 성령님. 허둥지둥 청소를 시작하려는 나를 만류하시며 '아니야, 내가 보기에는 깨끗한데?' 하시고는 마음 한가운데 자리한 십자가를 가리키시는 성령님. '이 더러운 사람 속에 찾아오실 정도로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나?' 하는 생각에 3절 가사의 뼈대를 가장 먼저 완성하게 되었었다. 가사 중 "가장 작은 내 마음 속에" 의 원래 버젼은 "가장 더러운 내 맘 속에" 였다. 작곡가께서 너무 세다고 만류하셔서 지금의 버젼으로 완성하게 되었는데, 요새도 가끔가다 살짝 아쉬운 마음이 스쳐 지나가곤 한다.
그렇게 3절 가사를 끄적이던 때가 성탄절 즈음이었는데 문득 성령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꼭 닮으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의 초라한 탄생을 지칭하는 전형적인 표현 '말 구유에 나신 예수님.' 최고급 의료진과 초호화 시설이 갖추어진 궁전에서 태어나셨어도 모자랄 우리의 왕이 고작 베들레헴의 말 구유에서 태어나셨다니. 애초에 인간의 몸을 입는 것 자체가 비천해지시는 길이었지만 설상가상으로 인간조차 꺼려하는 작고 초라한 곳에서 태어나셨다. 여기서 감동 포인트는, 단순히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것만이 아니라는 것. 하늘 저 높은 곳에서 구원의 해법 하나 뚝 떨어뜨려 놓으신 게 아니라 그 길을 이루시는 과정 가운데에도 인간들과 함께 하시려고 친히 인간의 몸으로 찾아오신 바로 그 낮아지심이다. 2000년 전의 예수님이나 지금 이 순간 내 안에서 나와 동행하시는 성령님이나. 시대가 바뀌고 방법이 바뀌어도 인간과 함께하시려는 그분의 사랑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과분하다.
가사가 완성되고 1-3절이라는 구조를 완성하게 된 것은 아침 말씀 묵상을 통해서였다. 역대하 6장, 성전을 봉헌하며 드리는 솔로몬의 기도를 통해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과 동일한 방법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성부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하늘 위의 하늘도 하나님을 모시기에 낮은 곳인데, 당신께서 이 낮은 성전에 친히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겠다니요?" 분명 최고를 추구하며 최선의 노력으로 지은 화려한 성전이었을 텐데도 그분께는 모자라다고 고백하는 솔로몬의 기도가 눈물겨웠다. 2000년 보다 더 먼 과거, 그 오래전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은 그런 사랑을 하셨구나. 아무리 가르치고 타일러도 죄의 길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기꺼이 그들과 함께 하시려 이 땅에 내려오셨구나.
그러나 하나님,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땅 위에 계시기를 우리가 어찌 바라겠습니까? 저 하늘, 저 하늘 위의 하늘이라도 주님을 모시기에 부족할 터인데, 내가 지은 이 성전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역대하 6장 18절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中)
수많은 드라마, 소설, 영화에서 사랑을 위해 신분을 포기하는 재벌남들의 이야기가 차고 넘치지만, 우리 하나님만큼 로맨틱한 분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한결 같이 우리를 사랑하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그분의 거룩함과 우리의 더러움, 그분의 높음과 우리의 낮음, 그분의 고귀함과 우리의 비천함, 그 극복할 수 없는 간격을 오직 사랑으로 채우신 임마누엘 하나님. 그 사랑을 받고 있는 우리인데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못마땅하고 부족하여 불평 불만 원망 질투 갈등일까. 그 사랑을 참되게 깨닫고 누리는 사람은 그런 삶을 살려고 해도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분이 여기, 낮고 천한 곳에 오신 것만으로 내 삶은 이미 풍족하고 내 영혼은 충만하다. 그 불변의 임마누엘 사랑보다 귀하고 강한 것을, 나는 여태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발견할 수 없을 것임을 믿음으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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