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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유신론자의 자아성찰

과정도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by 가나씨 2021. 1. 10.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16:9)

 

고등학교 때 이 말씀에 대한 비유적 설명을 본 적 있다. 노를 젓는 뱃사공의 비유였다. 사공이 열심히 노를 젓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바람과 물결을 통해 그 나아갈 방향을 정하신다는 거였다. 노력이 없으면 배는 나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 노력 끝에 닿게 될 곳이 어디인지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손에 달려있다. 그러니 열심히 노를 젓되, 이끄시는 곳이 어디일지 기대하며, 아름다운 주변 풍경도 두루두루 살피며, 그렇게 매일을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게 한, 쉽고도 간단명료한 비유였다.

 

11월 중순쯤 학교에서 날아온 이메일에 마음이 크게 동요했다. 우리 단과대에서 교수 한 명, 대학원생 한 명에게 주는 teaching award 기회가 열렸으니 지원해보라는 공고 메일이었다. 지난 학기가 세 번째 티칭학기였는데 그 이전 두 번의 오프라인/온라인 티칭은 개인적으로 박사과정 가운데 가장 큰 성취감과 만족감을 준 경험들이었다. 열심히 준비했고, 열심히 가르쳤으며, 매 수업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한 학기 다 마치고 나면 보람이 남는 일이었다. 대학은 '전인교육'이 아니라 '전문교육' 의 장이라는 말에도 동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좋은 영향을 주셨던 크리스천 교수님들을 떠올리면 학생들을 한 학기 동안 맡겨주신 영혼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매 학기마다 담당하게 된 학생들 한 명 한 명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하기도 했다. 티칭이라는 일에 애착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 상 꼭 받고 싶어요' 라는 솔직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결과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라는 고백을 다시 한번 올려드리면서도, 티칭을 향한 나의 마음과 애정을 하나님 아시오니 잘 준비하고 지원하여 좋은 결과 얻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기도를 시작했다. 지원 마감은 11월 30일. 준비해야 할 서류는 다섯 가지였고 그중 두 가지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야 했다. 교수 한 명에게서 recommendation letter 한 장, 그리고 내 수업을 들었던 학생 두 명에게서 support letter 한 장씩. 누구에게 부탁할지도 고민거리였지만 하필이면 11월 말에 땡스기빙 연휴가 껴있어 시간의 압박도 상당했다. 서둘러 부탁할 사람들을 정하고 최대한 빨리 컨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교수 추천서의 경우, 네 분을 마음속 후보군으로 생각했다. 지도교수, 친분이 있는 한국인 교수님, 이번 학기 RA 담당 교수, 그리고 한 번도 수업을 듣거나 조교를 담당한 적은 없지만 티칭 관련해서 이메일을 몇 번 주고받은 적 있는 학과장 교수. 그중에서 제일 먼저 부탁하고 싶었던 분은 학과장이었는데, 티칭 관련 이메일을 주고받던 중 학과 평균에 비해 강의평가 점수가 높다며 잘하고 있다는 격려를 받은 적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대학원생의 경우 지도교수로부터 '지도'를 받아 티칭을 진행해 나가는 게 정석이긴 하지만, 나의 지도교수는 '티칭이야말로 각 instructor 의 고유 영역이다' 라는 지론을 갖고 있기 때문에 크게 터치하지도 관여하지도 않아왔다. 게다가 연락 텀이 굉장히 긴 편이라 추천서를 11월 30일까지 써주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인 교수님이나 RA 담당 교수는 연락이 쉽게 잘 되는 편이기는 했지만 다른 일로 추천서를 한 번씩 부탁했던 적이 있어서 또 부탁드리기가 민망했다. 학계에서 커리어를 쌓으려면 입학 과정부터 장학금, 펀딩, 잡마켓 등등 모든 영역에 추천서가 필요하다 보니 이런 민망한 상황들이 자주 발생하는 게 당연한 데도 매번 마음이 참 어렵다. 아무튼, 티칭 관련에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있고, 이전에 추천서를 부탁한 적이 없으며, 연락도 쉽게 되는 교수로는 학과장이 제격이었다. 그러나 업무 이메일 외에 다른 친분관계나 학업관계가 없다는 점이 마지막까지 부탁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그 와중에 서포트레터를 부탁할 학생 한 명은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이번 학기 초반에 교환학생을 지원을 위해 나에게서 추천서를 받아간 학생이었다. 마침 내년 가을학기에 고려대 교환학생으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얼마 전에 들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 학생에게 제일 먼저 이메일을 작성하려고 하던 찰나, 지원요건을 다시 살펴보니 '현재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 이 아니라 '이전에 수업을 들었던 학생'에게 레터를 받아야 하는 거였다. 부랴부랴 지난 학기 학생리스트를 열어보니, 수업을 성실히 들어주던 남학생 하나 여학생 하나씩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지만 한 학기 전의 강사가 뜬금없이 연락하는 게 부담이지 않을까. 게다가 학기말 과제, 파이널 준비에다, 연휴를 앞둔 들뜬 마음으로 이러저러 바쁠 텐데. 사실은 그 친구들이 받을 부담보다는 혹시나 내가 받게 될 거절이나 연락두절이 두려웠던 거겠지만.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이 역시 망설여졌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의 인간적인 망설임을 당신을 의탁하는 마음으로 바꾸어 주셨다. 사실 모든 일들이 그렇지 않은가. 한 가지 일 안에도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한편 어찌할 수 없는 내 영역 밖의 부분도 있기 마련. 내 손 안의 일들은 내가 최선을 다할 테니,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하나님 힘써달라는 기도로 며칠을 보낸 후 떨리는 마음으로 세 사람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가장 빨리 온 답장은 두 시간 안에, 늦게 온 답장도 하루 안에 받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 오히려 힘과 격려, 지지와 응원이 가득 담긴 내용들이었다.

 

 

추천서를 부탁드린 학과장 교수에게서 온 답장
서포트레터를 부탁한 여학생에게서 온 답장. 수업 때 보여준 영화를 얼마 전 다시 한 번 찾아보며 배웠던 내용을 상기할 수 있었다는 부분이 감동적이었다. 

 

개인면담도 두세 차례 신청하며 학업에 의욕을 보여줬었던 남학생의 답장. 부탁을 하려고 보낸 메일이 부탁을 받은 사람에게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게 감사했다.

 

그리고 11월 30일 지원 마감일까지 하나하나씩 차곡차곡 도착하는 레터들을 보며 생각했다. 결국은 결과만 하나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과정도 하나님 주관 아래 있다는 것. 내 힘으로 준비해야 했던, 내 영역 안의 일이라 여겼던 Teaching Philosophy Statement 작성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저기 엉켜있던 하고 싶던 이야기들이 기도와 묵상 가운데 다듬어지며 잘 정리되었으니 이 또한 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지혜였다.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 순적하게 만나게 하시고 부족한 자에게 능력 주셔서 지원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해주신 하나님. 아직까지 결과가 나오지 않았지만 이 과정 가운데 한 번 더 하나님의 주권을 경험하고 묵상하게 되었으니, 이미 큰 복을 받았다는 만족이 내 안에 가득하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최후 종착지인 영혼의 본향 천국에 이르도록 이미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 인생사 거치는 동안 정차와 출발을 무수히 반복할 경유지들도 계획해두신 하나님. 끝이 어디일까, 있기나 할까, 이런 고민으로 가슴이 답답해질 때가 많은 유학생활 가운데 감사밖에 드릴 것 없는 선한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해오신 하나님. 이 작은 기회 하나, 용기 내어 붙잡고 실질적으로 준비해갈 수 있도록 모든 과정에까지 섬세하게 개입하신 하나님. 그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기에, 결과에도 과정에도 겸손한 마음으로 순복 할 수 있다. 앞으로의 인생길에서도 그 어떤 중요하고 가치 있어 보이는 일들 가운데 동요하지 않고 하나님 한 분 바라길 소망한다. 그분이 과정에도 계시고 결과에도 계시다면, 험난한 과정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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