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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타인의 글과 나의 이야기

사랑하는 여자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 <딸에게 주는 레시피>

by 가나씨 2021. 1. 17.

얼마 전, 결혼을 몇 달 앞둔 여동생과 엄마 사이에 큰 다툼이 있었다. 보통 둘 사이가 냉전기에 접어들면 동생은 안 하던 연락을 해오고 엄마는 하던 연락도 안 하는 편인데, 이번엔 엄마 쪽에서 연락이 먼저 왔다. 사건의 발단을 들어보니 역시나 별 거 아닌 사소한 일. 그러나 엄마도 동생도 서로에 대한 상심이 여느 때보다 컸다. 덩달아 나도 많이 섭섭하고 힘들었다. 엄마와 통화하면서는 동생 편을 들고 동생과 카톡 하면서는 엄마 편을 드는 게 내 자연스러운 스탠스인지라 에너지가 참 많이도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명확했던, 둘 다에게 공통적으로 전해야 했던 한 가지가 있었다. 무엇이 서로를 섭섭하게 했든 그 근원은 '이별을 앞둔 두 사람 사이에 부유하는 아쉬움' 이라고.

 

30년 인생 동안 엄마 곁을 떠나본 적 없는 동생이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일상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엄마와 함께 했기에 자잘한 감정의 주고받음과 그로 인한 갈등이 훨씬 더 많을 테고. 부모로부터의 정서적인 독립이 처음이니 그 역시 낯설 테다. 물론 결혼 후에도 여전히 같은 지역, 가까운 동네에 살겠지만, 그럼에도 독립은 독립이니까. 개인의 성장기와 가정사의 여러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 있는 이 가정을 떠나 새로운 가정을 준비하는 과정. 그 가운데, 감사, 미안함, 아쉬움, 후회, 슬픔, 서운함, 그럼에도 사랑함 등등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여러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마주할 수밖에 없겠지. 이른 나이부터 부모를 떠나 혼자 살았기에 그저 '엄마아빠 보고 싶다' 이런 하나의 감정이 비대해져 있는 나보다는 훨씬 더 복잡 미묘할 테다, 동생의 마음은.

 

가족 모두의 예상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막내딸을 떠나보내는 부모님의 심경 역시 단순하지 않다. 어쩌면 홀가분이나 설렘, 기대 등과는 거리가 먼 것도 같다. 결혼 얘기가 나오던 초창기부터 두 분 다 참으로 복합적인 감정을 어떻게 다룰지 몰라하시는 게 느껴졌다. 결혼을 반대하는 것도, 예비 사위를 맘에 안 들어하는 것도 아니면서, 다만 딸을 보내기 아쉬운 감정을 하루하루 키워가고 계신 듯했다. 아빠도 그렇지만 엄마는 특히나 더. 그러니 평소였어도 티격태격했을 사소한 서운한 일들이 요 몇 달 엄마와 동생을 휘어 감고 있던 기저의 감정들과 만나 파바박 스파크를 일으킨 게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르겠다. 그 스파크에 당사자들이 제일 큰 상처를 입었겠지만 나 또한 감전당한 듯 속상했다. 다행히 하루 만에 마음을 추스른 동생이 '언니 슬프게 해서 미안해'라는 카톡을 보내왔지만. 큰 안도를 넘어설 정도로 마음속에 마저 남은 속상함이 컸기에 그날 참 많이도 울었다.

 

그래서인지, 평소였으면 집어 들지 않았을 이 '여자여자'한 제목과 표지 삽화의 책을 가벼운 마음으로 펼치게 되었다. 이 책을 빌려준 친구도 얼마 전 엄마와의 다툼을 얘기하며 내 앞에서 서럽게 눈물을 흘렸던 차였다. 엄마랑 딸은 무얼까. 서로 제일 사랑하면서 왜 서로 가장 자주 상처를 주고받을까. 엄마는 어떠하고 딸은 어떠해야 둘 사이를 애증보다는 따뜻함으로 가득 채울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 가운데 덧씌워지는 작가의 문장들은 그녀가 전수하는 스물일곱 요리들처럼 단순하고 쉬워 잘 읽혔다. 어떤 요리들은 내가 익숙하게 해 먹는 것이기도 해서 반가웠고, 또 어떤 요리들은 당장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해먹어 보고 싶을 정도로 구미가 당기기도 했다. 그 중 열다섯번 째 '두부탕'은 며칠 전 엄마에게 전수 받은 전골 레시피와 딱 하나 빼고는 과정도 재료도 똑같아서 신기했다. 작가는 새우젓으로 간을, 우리 엄마는 고춧가루와 간장으로 간을 하는 게 차이였다. 둘 다 시도해보고 싶었지만 마침 새우젓이 똑 떨어졌다는 핑계를 대며 엄마표 찌개를 해먹는 나 스스로를 보며, 역시 팔은 안으로 굽는가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굉장히 사색적이기도 했다. 중간중간 드러나는 그녀와 딸 사이의 에피소드들과 그녀의 인생 그 자체도 여느 사람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저기 상처와 아픔들이 있어 보이는데 반해 글은 참으로 우아하고 흠 없었다. 돈벌이에 가사 노동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보통 엄마들의 말투나 표현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네들의 말투와 행동은 삶을 버티고 자식들을 지탱하느라 투박하고 거칠게 마모되어 있다. 그 거칠고 투박한 엄마의 모습에 딸들은 자주 오해와 상처를 쌓아가고, 그러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답습한 엄마의 모습으로 다시금 엄마를 대하며, 결국 둘 사이에 끊어낼 수 없는 악순환을 반복하는 경우들을 종종 보게 된다. 그러나 이 책 속의 작가는 한없이 다정하고 따뜻하기만 한 엄마로 느껴졌다.

 

작가가 보통 엄마들과 다른 삶을 살았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에세이 속에 드러난 그녀의 삶은 우리엄마의 삶과도 여러 부분 닮아 있어 엄마가 더더 그리워지기도 했다. 다만 그녀가 '작가'이기에 이렇게 모두가 바라는 지혜롭고 현숙한 어머니의 말투와 인격으로 글을 써 내려갈 수 있지 않았는가 싶다. 삶의 모든 역경을 기도와 인내로 이겨낸 외유내강의 전형. 속은 단단하지만 겉은 부드러운 여자. 나도 어릴 적엔 우리엄마가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 실제로 우리엄마 그랬었는데. 서른이 넘은 내 눈에 이제 엄마는 작은 일에도 쉽게 흔들리고 무너지는, 세상 풍파를 맞서며 강인해지기는 커녕 마음이 닳고 약해져 버린 상처투성이의 소녀이다. 부드러웠던 겉이 많이도 거칠어졌고 단단했던 속이 많이도 물러진, 우리엄마.

 

그래서 오히려 위로가 되는 책이었다. 나는 아마도 평생 당신의 레시피보다 우리엄마 레시피를 더 친근하게 여기겠지만, 그래도 우리엄마가 해주지 못했던 이야기들 나에게 해 줘서 고마워요. 우리엄마가 당신의 어휘와 차분함으로 이러저러한 인생의 지혜를 전해주지는 못하겠지만, 당신과 같은 마음으로 나와 내 동생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해줘서 고마워요. 한 장 한 장 챕터를 넘길 때마다 이런 고마움으로 읽어 내려갈 수 있는 책이었다.

 

동생이 미안하다는 카톡을 보내오기 전, 내가 마지막으로 남겨둔 카톡은 이러했다. 너가 부모 곁을 떠나 새 가정을 이루는 걸 준비하는 이 시간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그 정서적, 정신적인 이별을 맞이하고 싶은지 잘 생각해봐. 그게 진짜 너가 못마땅하고 서운했던 것들 다 폭발시키고 끝내는 건지, 부족했지만 사랑했던 부모와의 아쉬운 하루하루를 마지막까지 감사와 사랑으로 채우고 이해하며 마무리하는 건지. 이역만리 타지에서 보낸 간절한 마음이 덜 전해졌을까봐 집으로 이 책을 한 권 주문해 보냈다. 엄마가 언니한테서 책 얘기 듣고 사서 너한테 선물하는 거라고 말하라는 작은 트릭도, 빼먹지 않고 엄마에게 전했다. 작가가 딸에게 주고 싶었던 스물일곱 꼭지의 이야기와 레시피들은 언니가 동생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기도 한가보다. 받아 읽는 동생의 마음이 엄마를 향해 감사와 사랑으로 채워지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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