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다는 관성에 젖어 죽음을 잊고 지낼 때가 많지만 우리는 늘 죽음과 함께 살아간다. 가까운 주변 사람부터 사실상 나 개인과는 무관한 사람까지, 수많은 다른 존재들의 죽음이 곁을 스쳐 지나가기 때문이다. 지난 몇 달간 내 귀에 들려온 죽음의 이야기들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여행용 캐리어 안에서 생을 마감한 어린아이의 이야기, 경찰의 무력진압으로 인해 숨이 끊긴 흑인의 이야기, 팀 내 괴롭힘으로 인해 몇 번이고 자살 시도를 했다는 어느 연예인의 이야기.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도 멀지 않았다. 유학생활을 시작한 이후 외할아버지와 친할머니를 이곳 미국에서 보내 드려야 했던 순간들은 타인의 죽음이 내 삶에 가장 큰 그늘을 드리운 나날들이었다.
그러나 시선을 돌려 타인의 죽음이 아니라 딱 한 번 뿐일 나 자신의 죽음을 생각할 때에는 마음가짐이 좀 다르다. '나도 언젠가 죽겠지' 라는 명제를 상식 선에서는 인정하지만 현실감 있게 자각하고 살지는 못한다. 사실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곧 죽음과 한 발짝 씩 가까워지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만큼 개인에게 있어 자기 삶의 관성이, 그리고 생의 선명함이 강렬하기 때문일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나라는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 오늘 누리는 이 모든 감각과 의식이 내일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은 애초에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인지도 모른다. 죽음의 마지막 순간을 앞둔 사람들조차도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거나 준비하기 쉽지 않다는 걸 보면, 생명체로서의 인간은 언제나 저 깊은 무의식 속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봉인해 두고 사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그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책이었다. 깊이 감춰두었던 '나의 죽음'을 꺼내어 이리저리 들춰보자고. 나의 죽음과 객관적으로 눈을 맞추어 보자고. 그리하여 내 인생의 한 부분일 '죽음'을 조금 더 성숙하게 맞이하자고 초대하는 책이었다. 그 초대를 보다 효과적으로 제안하기 위해, 책을 읽고 있는 독자의 죽음을 가정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부터 그 이후의 모든 법적·실무적·행정적 절차들까지를 상세하게 다루었다. 조금 더 다양한 상황을 그려볼 수 있도록 두 가상의 인물의 죽음도 함께 그려놓았다.
사실은 책을 다 읽고 내려놓은 지 조금 되었는데 어떻게 감상을 남겨야 할지 막막해서 글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지난 주말부터 대한민국을 여러 논쟁으로 갈라놓는 두 죽음을 목도하며 비로소 이 책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현실감 있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책 제목이 왜 '죽음의 절차' 혹은 '죽음의 현실' 등등이 아니라 '죽음의 에티켓' 일까라는 고민도 했었는데 죽음에 대해 예의를 지킨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나름대로 생각해 보게도 되었다.
두 인물의 죽음에 관한 정치적 논쟁은 결국 그 죽음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살아온 삶의 행적이 논쟁의 여지를 지니고 있다는 데 기인한다. 인권변호사이자 유능한 행정가로 한 길을 걸어온 줄로만 알았던 인물이 아랫사람을 대상으로 성추행을 일삼아왔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대한민국은 무죄추정의 원칙도 없는 나라냐는 반발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애석하게도 무죄로 추정받고 판결이 나오기까지 기다리기를 포기한 것이 당사자다. '다른 한쪽의 이야기도 들어보자'라고 공정한 스탠스를 취할 수 없도록, 당사자가 삶을 포기해버렸다. 더불어 성추행이 사실이었음을 가정해본다면, 당사자의 죽음이 2차 가해라는 명제 또한 피해 갈 수 없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에 대해 애도를 표하고 조문에 나섰지만 또 다른 많은 무리의 사람들은 시장(市葬) 으로 치러지는 장례를 용납할 수 없다며 반대를 표했다. 10년이 다 되어가는 기간 동안 지역자지단체장으로 공무를 수행한 인물에 대해 그 업적과 공로와 자격조차 인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50만 명이 넘는다면, 그의 인생 마지막 몇 년은 도대체 어떤 삶이었다는 말인가? 50만이라는 숫자를 셀 필요도 없이, 어느 한 사람으로부터 '업무 상 위력에 의한 지속적인 성추행'이라는 혐의로 고소를 당했다면, 그는 어떠한 리더였던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그 반대와 비난을 여러 방법으로 막아내며 그의 공을 되새기는데 주력하고 있다면, 그가 쌓아온 그 무수한 선과 유익은 얼마나 가치 있었다는 말인가?
육군 참모총장이자 외교관으로 고위 공무직을 수행한 한 인물의 죽음에 대해서도 논쟁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국립현충원에 안장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고, 다른 어떤 사람들은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누군가는 그를 호국영웅으로 치켜세우며 추모하지만 누군가는 그를 친일세력으로 비난하며 야스쿠니 신사에나 모시라고 냉소한다. 실제로 그가 안장된 국립 대전현충원 앞에는 상반되는 두 플래카드가 걸렸다고 한다. 그곳이 그 인물의 장지가 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더 마땅한 자리에 모시지 못한 송구스러움이 되는 한편 다른 누군가에게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정도로 억울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그가 누이기에 가장 적합했던 자리는 도대체 어디였던 것일까?
현재 각자가 처해있는 입장에 따라서, 당사자들과 맺은 개인적인 관계에 따라서, 혹은 역사 인식과 정치 이념에 따라서, 이 두 인물의 죽음을 다르게 평가할 수밖에 없다고들 한다. 맞는 말이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다. 그저 두 인물, 故 박원순 시장과 故 백선엽 장군의 삶이, 그 행적이, 이중적이고 모순되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각자의 삶에 이중성과 모순을 안고 살아가지만, 그들의 경우 우리 사회 전체가 분열될 수 있을 정도의 틈바구니에 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은 그들의 죽음으로 인해 기어이 다시 꿰맬 수 없는 모습으로 터져버렸다.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라는 말이 역설하듯이 화해할 수 없는 것들을 끌어안으며 살아왔기에 죽음과 함께 터져버린 것들이다. 그 잔해를 바라보며 그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 그렇게 죽고 싶었던 거냐고.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냐고.
덮어버린 책을 상기하며 그들의 죽음을 생각한다. 그들의 육체가 죽음을 맞이하고, 법적으로, 실무적으로, 행정적으로까지 죽은 자로 확정되던 그 순간들이 어떠했을지 그려본다. (경찰공무원으로 근무 중인 한 지인은 실제로 시장 사망 이후 바디캠을 확인했다고 한다. 덕분에 책에서 그리고 있는 한 장면을 간접적으로나마 가까이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유족들과 지지자들의 마음을 생각한다. 피의자의 죽음을 접하고 황망했을 고소인의 마음을 생각한다. 죽음이라는 마지막 앞에서도 용서와 화해가 아니라 억울함과 분노로 목소리를 내야 했을 독립군 후손들의 마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어떻게 기억하며 어떻게 잊을 것인지 생각한다. 답을 찾기가 쉽지는 않다. 그러나 이 책이 전해준 메시지처럼, 더 자주, 더 깊이, 더 끈덕지게 죽음을 생각하고 삶을 고민해야겠다는 생각만은 선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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