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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두서 없이 맥락 없이

5월이 슬픈 까닭

by 가나씨 2020. 5. 23.

2009년 5월 23일.

 

그날은 참으로 황망한 날이었다.

대학 새내기로서 처음으로 교외 무언가를 도전한 것이 한자급수시험이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 학창 시절만 하더라도 한자공부가 꽤 강조되곤 했다. 국어를 잘하려면 한자를 알아야 한다는 게 이유였던가. 영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잘 쓰지도 않는 한자를 오래도 배웠다. '중학생 때 5급까지 따놓았으니 성인이 된 지금은 2급 정도는 돼야겠지' 이런 막연한 생각으로 무작정 시험을 등록, 한 달 정도 독학을 했다. 새내기 바람이 들어 하는 둥 마는 둥 공부한 터라 살짝 불안하긴 했지만 시험을 치르고 몇 주 후 나온 결과는 다행히도 합격이었다. 그렇게 딴 한자 2급을 단 한 번도 어딘가에 써본 적이 없다. 덕 본 적 없이 유효기간도 지나버렸다. 이렇게 황망할 때가. 장롱면허보다 더한 장롱자격증을 얻은 셈이었다. 그래, 그 시험을 치른 날이 바로 2009년 5월 23일 토요일이었다.

 

시험을 치르고, 꺼두었던 핸드폰 전원을 켜고, 습관처럼 들어간 네이버에서 만우절에나 볼 법한 헤드라인을 보게 되었다. 기사를 읽고 또 읽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분이 왜 자살을? 그분은 내가 한창 아이돌에 빠져있던 중학교 시절부터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재임한 대통령이셨다. 어린 나에게 대통령을, 정치인을, 한 공동체의 리더를 판단할 만한 지식도 경륜도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그분을 '멋있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그분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어리기도 했지만 우물 안 개구리이기도 해서 세상 돌아가는 일을 눈곱만큼도 몰랐기 때문이다. 아마도 대구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탓이 컸겠지. 고3 시절 광화문 한미 FTA 반대 집회 사진을 보며 '저게 진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일까?'라는 의문을 품기도 했을 정도니까. 이 좁은 나라에서 이렇게나 수도와 지방의 격차가 크다. 다른 것 보다 정치문화의 격차가 도드라지는 것이 문제겠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내 안에는 그분에 대한 이유 없는 적대나 폄하가 없었다. 이와 더불어 사회과학 전공생으로서 대학생활을 시작한 만큼 현대 정치사를 좀 공부해야겠다고, 그분을 좀 더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대학 첫여름방학 배낭여행지 후보로 봉하마을을 생각하고도 있었다. 하필이면 그런 타이밍에 그분이 돌아가셨다. 황망하기 그지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자살이었고 여러 음모론과 소문들로 한동안 흉흉했으나 한동안은 그저 마음속에 묻어둘 수밖에 없었다. '그분이 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이 정도 생각이 문득문득 스치고 지나갔지만, 이후 나의 관심사는 한국정치가 아닌 국제정치가 되어버렸고 그분에 대해 알아보겠다던 다짐을 실천하기엔 바쁜 게 너무나도 많은 대학생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분이 참 똑똑한 사람이어서 그렇게 생을 마감한 것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한 사람의 죽음을 놓고 그런 생각을 했던 나는 얼마나 마음이 메말랐던 것일까.

 

그 메마른 마음에 정신이 차려지기 시작한 건 석사 시절 한 연구 프로젝트에 연이 닿으면서부터였다. 프로젝트 책임자가 참여정부 시절 차관급 정무직 공무원을 하셨던 분이셨고 함께하게 된 박사님들은 모두 386 세대 혹은 그 바로 아래 후배 세대셨다. 무엇보다 프로젝트 자체가 '한국 대통령제'에 관한 것이었다. 대통령제라는 '제도'가 대통령 '개인'에게 어떠한 제약을 부여하며 어떠한 권한을 쥐어주는지 처음으로 진지하게 배우며, 또 그분들을 통해 듣는 '리더' 노무현과 '인간' 노무현을 그리며, 서서히 몇 가지가 또렷해졌다. 그중 가장 선명해진 것은 2009년 5월 23일 느낀 그 황망함이었다.

 

그 황망함을 무엇에 견줄까? 유학생활 가운데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물밀듯이 밀려오는 슬픔과 황망함을 경험하기는 했다. 급작스럽고 예상할 수 없던 일이었다. 외할아버지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게, 아니 한 번이라도 더 뵙지 못한 게 한 없이 아쉬워지는 일이었다. 그러나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일어날 때가 되어 일어난 그런 일이었다. 보내야 해서 보낼 수밖에 없는 그런 일.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도 그런 일이었나? 누구의 잘못도 아닌, 그저 때가 되어 맞이한 그런 일이었나? 타살이 아니니 누군가에게 콕 집어 책임을 물을 수 없다면, 얼마나 촘촘히 얽히고설킨 구조적 요인들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인가?

 

그분의 서거에 이리저리 흔적을 남긴 숱한 세상의 때, 탐욕과 정치놀음, 오만과 멸시에는 가슴이 터질 듯 답답하다. 그러다 다시 그분의 치열한 인생을 생각하노라면 그저 목 놓아 울고 싶다. 그분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벌이는 시합인 줄 알면서도 '새 시대의 첫 차'가 되길 꿈꾸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제도를 휘어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구조를 변화시키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거대한 구조적 영향들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기에는 한 없이 약한 개인이었다. 힘겨웠던 과정을 다 지내고 쉬러 내려간 고향마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정했다면, 그 결정은 도대체 얼마나 황망한 선택인가. 우리네 정치사에 무고한 희생과 안타까운 죽음들이 즐비하지만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이만한 비극은 없다. 그 비극이 서러워 얼마 전 지인과의 통화 가운데에도 그분 이야기를 하며 한껏 울었다. 일면식 없는 나조차 이런데 그를 가까이에 두었다 잃은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마음을 다잡고 다시 걸아갈 채비를 했을까?

 

해를 거듭할수록 나에게 가장 슬픈 달은 5월이다. 아직도 마음에서 그분을 떠나보낼 수가 없는 까닭이다. 황망한 비보에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던 그 날이 벌써 11년 전이란다. 우리 사회가 그 정도 큰 인물을 감당할 수 없는 사회였기 때문인 건지, 세상에는 원래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서인 건지, 아니면 그저 한 개인의 운명이자 팔자였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분을 그렇게 보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렇게 황망히 보내서는 안 되는 분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황망하다. 아직도 '살아계셨더라면 어땠을까' 이런 상상보다 '이러이러했더라면 돌아가시지 않으셨을까' 이런 생각으로 슬픈, 2020년 5월의 끝자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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